순수함에 대하여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그리고 그 순수함은 선함과 같다고들 말합니다.
그 말은 오랫동안 저에게 익숙하게 들렸고, 마치 당연한 진실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하게 숨고 싶었고, 부끄러웠으며, 때로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먼저 어릴 적의 저를 떠올려야 합니다.
어릴 적 저는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보다,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어른들은 저를 칭찬했고, 그 말들이 저를 기분 좋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엄마가 제게 했던 한마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건 네 나이에 어울리지 않아.”
아주 부드럽고 조용한 말이었습니다.
화도 아니었고, 금지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저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건 단순히 만화 한 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점점 어떤 감정이 ‘옳은지’, 어떤 취향이 ‘안전한지’, 스스로 판단하고 조절하는 아이가 되어갔습니다.
엄마는 저를 통제하려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말들은 제 안에 보이지 않는 기준을 만들어냈고,
저는 점차 ‘어떤 사람인가’보다 ‘어떻게 보이는가’가 더 중요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순수하다’는 말이 붙는 순간, 어떤 감정도, 어떤 생각도, 어떤 취향도 자유롭게 꺼낼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순수한 아이’라는 말은 저를 보호해주는 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부정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며 “참 순수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아마 저를 칭찬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저는 늘 창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말은, 제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감정을 고르고, 얼마나 많은 것을 감춰가며 행동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순수함은 흔히 선한 성질로 여겨지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기엔, 순수함은 오히려 무지나 미성숙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순수한 말과 행동은 종종 타인을 다치게 하고,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서 면책되기도 합니다.
“그건 순수한 의도였으니까.”
“아이니까 몰랐을 거야.”
이런 말들은 무지를 선함으로 덮어버리고, 성찰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이상화하곤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함이란, 판단하고, 고민하고, 책임지려는 태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순수함을 선함이라 부르기보다는, 그저 출발점, 혹은 성찰 이전의 상태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하지 않을까요?
어릴 적 저는 ‘억압’이라는 말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엄마는 저를 강하게 훈육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억지로 금지한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 시절 들었던 조용한 말들이 제 내면에 아주 선명한 경계선을 그어놓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경계는 제가 어떤 사람이 되려 할 때마다 한 번 더 멈추게 만들었고,
어떤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이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잖아’ 하고 돌아서게 만들었습니다.
엄마는 그 말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마음을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엄마를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시절 제 안에서 만들어진 검열과 망설임,
그리고 그 속에서 제가 느낀 감정들을 이제는 조용히 마주하고 싶습니다.
요즘 저는 순수한 어린아이들을 보면 가끔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그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아무 제약 없이 말하고, 웃고, 표현하는 모습을 볼 때
문득 그렇게 살 수 없었던 제 과거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정을 숨기고, 취향을 감추고, 사람들이 원하는 반응을 먼저 생각하며 ‘순수한 아이’의 틀에 저를 맞췄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순수함보다, 그 순수함을 이상화하고 미화하는 어른들의 시선이 더 두렵고 때로는 거슬립니다.
그 시선은 때로 복잡함과 모순, 성장의 과정을 ‘오염’이라 부르는 시선이기도 하니까요.
철학적인 언어를 쓰지 않더라도, 저는 이제 ‘나로 존재하는 것’의 중요성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건 나중에 알아도 돼.”
“내가 너 나이였을 땐 말이야…”
그런 말들 속에서 저는 지금의 제 감정과 생각이 언제나 미완성이고, 부족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성숙이란 나이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정직하게 인식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선택하며 살아가려는 태도라는 것을.
지금 저는 제가 좋아하는 문화를 즐기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제가 선택한 것들로 하루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엄마는 가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라고 말하지만,
더 이상 저를 멈추려 하진 않습니다.
저도 곧 성인이 되니까요.